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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벌 보리스] 2화. 창밖 살랑이는 이팝나무 꽃

채영준과 전기연의 집에는 인간의 음식뿐만 아니라 의외로 꿀벌로서 먹을 것 또한 넉넉하였다. 꿀을 단지째로 먹는 채영준과, 꿀을 다른 음식에 타 먹는 듯한 전기연 모두 꿀단지 밀봉에 큰 주의를 기울이는 편은 못 되어서, 그들이 꿀을 먹고 나면 물기 없는 설거지통에 넣어 둔 숟가락이나 꿀 스틱, 바깥으로 흘러 끈적해진 꿀병 외벽에 남아 있는 꿀로 며칠은 충분히 포식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그들이 또 꿀 생각이 나는지 같은 행동을 반복하였기 때문에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늘 배가 불룩하여 예전처럼 가볍게 날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에 꿀 말고도 이런 별미가 있구나 알려 준, 나 자유의 벌 보리스로서는 처음 먹어 보는 종류의 달콤함도 있었다. 전기연은 채영준이 없거나 늦는 밤이면 꼭 러시아식 케이크(이 달콤함에 붙여진 이름은 전기연이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알게 되었다)를 두 조각씩 사 와 끼니 대신 먹었다. 엄청난 양의 우유와 함께……. 전기연은 러시아식 케이크 두 조각을 단숨에 해치운 뒤 곧바로 잠들었고, 덩치 큰 고양이도 이것만큼은 전혀 탐을 내지 않았으므로 나는 맛 좋은 부스러기가 곁들여진 꿀…… 아니 꿀은 아닌 것 같고 이 달콤함의 정체는 무엇이지? 아무튼 정체 모를 황홀함을 쭙쭙 빨아 먹었다. 그러고는 곧장 나의 솔방울 침실로 날아가 전기연이 그랬듯 기절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기연과 채영준은 하—아—아— 하고 긴 숨을 내쉬는 것이 버릇인 듯하였는데 꼭 한 번씩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이렇게 소리를 쳤다. “나도 힘든데 한숨 좀 쉬지 마!” 그러는 당신도 조금 전 긴긴 숨을 내쉬었는데……. 그럴 때면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조금 전의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지겨워져 차라리 덩치 큰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큰소리가 오간 날에는 술병들이 놀라운 속도로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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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고양이는 전기연에게 밥을 달라고 요구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옷 무더기가 걸려 있는(그걸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옷걸이에 옷들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매달려 있는……) 작은 방과 침대로 가득 찬 큰 방, 부엌 싱크대, 식탁 밑, 거실의 계단형 책꽂이 위쪽을 차례로 순찰한 뒤 창가로 다가와 오래도록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3시, 오후 5시 하루에 총 네 번 순찰을 하였고 어지간하면 그 일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돈벌레며 바퀴벌레며 파리며 때때로 집 안에 출몰하는 작은 생물들은 덩치 큰 고양이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뭉툭한 두 발 사이에서 이쪽저쪽으로 꼼짝없이 튕겨지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나 자유의 벌 보리스가 처음에 덩치 큰 고양이를 무척 경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덩치 큰 고양이는 나 자유의 벌 보리스 몸을 뒤덮은 털 때문일까, 나를 자신과 비슷한 종의 생물체로 인식하는 듯하였고 크기로 미루어보아 새끼가 분명하겠지 하는 듯하였다. 어느 날엔가 내가 창가 앞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가 내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쭈쭈쭈…… 아기야 너도 벌써 창가가 좋으냐…….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당황하여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으나 그러자 고양이는 다시,

창가는 돌아볼 것들이 생겨야 오는 법인데…… 너는 여기를 뛰어다녀도 모자란 시간에 일찍 철이 들었구나…… 유난히 작은 몸이 귀여워 쭈쭈쭈…….

덩치 큰 고양이는 ‘벌’이라는 것은 본 적이 없는 듯하였고 나는 새끼고양이인 척을 해야만 그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은 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없지…… 여기가 내 집이잖니…….

나가 보고 싶지는 않으세요?

그러고 싶기도, 그러고 싶지 않기도…… 난 원래 길에서 살았던 터라…….

그래도 꽃나무가 저렇게 흔들리는데요.

가끔 이쪽으로 바람이 불면 꽃나무 향기가 이 집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한단다…… 운이 좋아야 말이지만…….

나는 창밖의 이팝나무를 바라보다가 그의 녹색 눈에 비친 이팝나무를 바라보았다. 이팝나무는 덩치 큰 고양이의 녹색 눈 안에서 더욱 훌륭한 조형미를 갖추었다. 곧 그는 잘 시간이 되었구나…… 중얼거리며 전기연과 채영준의 침대 위 갈색 이불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의 잘 시간에 맞추어 나 자유의 벌 보리스도 나의 솔방울 침방으로 날아가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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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 인간의 집 안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기연과 채영준은 80세가 넘어야 자연사할 것이므로 적어도 나 자유의 벌 보리스의 생 동안에는 내가 원한다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낼 수도 있었다. 끝모르고 연장되는 나의 생이 언제 끝을 맞이할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문제지만.

영원히 계속되고 반복되는 이 집 안의 질서에 편입되어 이제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팝나무의 흔들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엉덩이가 간지러웠다. 아아 여기 평생 먹어도 좋을 만큼의 꿀이 있으나 왜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자유의 벌 보리스이기 때문……. 나는 내게 거리 생활 시절의 무용담을 들려주기 시작한 덩치 큰 고양이의 장광설을 뒤로 하고 (이 둘 전에도 내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이사를 가면서 나를 두고 간 것이지……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골목을 헤매야 했는데 내가 힘이 무척 세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지…… 골목을 하루아침에 평정하고 근방에서 가장 높은 벽돌담 위에 올라 졸고 있는데 습격을 받은 거야…… 내가 굴러온 돌이라고 생각하였을 거리의 터주대감 짐승들이었지……) 방충망 작은 틈으로 포르르 날아올라 창밖으로 나섰다.

저는 사실 벌입니다.

너…… 어떻게…… 벌이 무어야…….

벌은 작지만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독침을 가진 털북숭이 생물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위험해…….

저 나무까지만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올 작정이에요.

그럼 내가 여기 창가에서 떠나지 않고 앉아 있을 테니 여길 찾아 돌아와…… 부디 조심하여야 해…….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내가 포유동물 새끼가 아니라 벌이었다는 사실보다 나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 주는 덩치 큰 고양이의 성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 오랜만에 단지에 담긴 것이 아닌, 꽃꿀이라는 것을 먹고 다시 돌아가는 거다! 그러고는 나를 기다려 준 저이에게 바깥의 풍경을 들려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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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까지는 금세 도달하였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그것을 타고 나는 재미가 상당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아 이팝나무에 핀 꽃에는 꿀이 전혀 없었다! 어 분명 꽃향기에서는 꽃꿀의 기미가 느껴졌는데? 아무리 꽃송이와 꽃송이 사이를 날아다녀 보아도, 꽃꿀을 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꿀샘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고, 저 작고 좁은 꽃송이 안 꿀샘이 있대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나 자유의 벌 보리스…… 인간들과 생활하다 보니 벌의 본능이 그새 퇴화되고 만 것일까? 조금만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가자. 나 자유의 벌 보리스는 무척 서글펐다. 솔방울 침방이 금세 그리워졌다.

그런데…… 집이 어디지? 집에서 이팝나무 쪽을 바라볼 때는 전혀 몰랐으나 이팝나무 쪽에서 날아온 곳을 바라보니 거대한 벽 하나가 서 있는 듯하였고 그 안에서 덩치 큰 고양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3화에서 계속)

정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