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벌 보리스] 1화. 자유의 몸 보리스
나 일벌 보리스.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한 산림욕장에 거처를 두고 있다. 같은 벌통에 거주하는 1만 9천여 마리 일벌이 그러하듯 나 역시 Mi Capitán… 그러니까 인간들이 여왕벌(윽!)이라고 하는… 그에게서 탄생하였고 본래 숙명대로라면 한 달 살고 죽음을 맞이하여 곧 짓물렀겠지만 Mi Capitán의 로열젤리를 때때로 훔쳐 먹은 탓일까? 나 일벌 보리스는 여름벌임에도 불구하고 8개월째 살아 있다.
위에 보이는 두 통의 벌집 중 왼쪽이 나의 집이다. 밀원은 풍부한 편이라 배곯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나 말벌이 좀 많아야지…. 꿀벌 한 마리를 공중에서 채가 씹어먹는 등검은말벌이라야 운이 나쁜 벌들 몇몇이 당하기도 하였으나 집 안으로 기어 들어온 장수말벌과의 결투에서는 대개 우리 쪽이 승리하는 편이었다.
8개월쯤 살다 보니 장수말벌과의 전쟁도 수차례 치르게 되었는데, 어제 있었던 전투에서 나 일벌 보리스는 온몸이 전과 다른 감각에 휩싸였다. 이 달라진 감각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단 하지 않으면 잘 설명할 수 있는지 아닌지 알 수조차 없으므로 시도해 보기로 한다…. 일전의 전투에서는 이긴 뒤의 잔여물이 일절 없이 곧바로 주어진 할 일에 몰두하였다. 우리 일벌들은 애벌레 돌보기, 화분 채취하기, 꿀 따오기, Capitán 보필하기… 수명에 비해 무겁게 주어진 임무에 쉼 없이 바빴으므로 벌 하나하나가 거대한 동물의 세포처럼 행동하고는 하였는데, 그때 내겐 꿀벌 따오기(당시 나 일벌 보리스의 임무)로 기꺼이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은 영 깃들지를 않고 날개를 흔들면서 전투 승리를 축하하고 싶어진 것이다. 화났을 때 떨어대는 날갯짓과는 달리 살랑
살
랑
한 움직임을 해 보이고 싶었달까? 나 일벌 보리스는 옆에서 열심히 애벌레 돌보기로 복귀한 동료들 보란 듯이 살
랑
살
랑
움직였다. 승리는 이렇게 만끽하는 거야 친구들아….
그러자 일동 침묵. 내게 꽂히는 1만 9천여 벌들의 시선. 밀랍 너머 보이지 않는 벌들의 시선까지 나는 생생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알겠어… 일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재미없는 것들…. 재미를 알게 된 나 일벌 보리스는 말벌들이 득시글댈지도 모를 벌통 바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염려대로 꿀벌의 육체를 노리는 등검은말벌들이 벌통 문 앞에서 호버링 중이었으나 나는 8개월이나 살아남은 관록 있는 벌로서 그들을 놀리는 조롱 비행을 선보인 뒤 꽃꿀나무가 군집해 있는 산 아래로 향했다.
때죽나무 꿀을 쪽쪽 빨다가 벌통 복귀를 미루고 꽃송이 안에 몸을 감춘 채 잠깐 휴식을 누리고 있는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다…. 우리 벌통을 ‘돌본다’라고 표현하면서 미숙한 손놀림 탓에 훼방만 놓는 그 둘이 온 것이다. 둘은 그날도 양손 가득 짐을 진 것도 모자라 수레까지 끌고 있었다. 고작 두 통의 벌을 먹이면서 저 거추장스러운 준비물들은 다 뭐람…. 그들의 어리숙함은 벌들 사이 소문이 진작 나 있는 터라 나 일벌 보리스는 저게 참 다 뭐람… 무슨 소용이람… 하고 그들의 무위無爲가 우스워졌다.
그런데 무위라…. 나 일벌 보리스가 지금 꽃송이 속에 숨어 들킬세라 만끽하고 있는 게 무위 아닌가? 그렇다면 저들은 내가 갖고자 열망하는 무위를 타고난 존재들이라는 것이고, 그들 같은 존재들이 벌 떼처럼 모여 사는 세상은 또 어떨 것이야? 나 일벌 보리스는 처음으로 그들의 종종대는 뒷모습이 탐스러워 보였고 벌통 복귀를 또 잠시 미룬 채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몸에 새겨진, 기원전부터 진화와 생존을 거듭한 원시 벌 조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며…. 그러자 금세 망설임 없는 결론에 이를 수가 있었고 꽃송이를 떨치고 나와 행동 개시에 나섰다.
우선 벌통으로 돌아가 Mi Capitán을 찾아 방금 먹은 때죽나무 꿀을 게워내곤 일벌들이 채워 놓은 로얄젤리를 복부의 막이 얇아질 만큼 배불리 먹었다. Capitán의 진노와 일벌들의 망연함을 앞에 두고 나 일벌 보리스는 선언했다.
나 일벌 보리스는 갑니다. 저 바보 같은 둘을 따라서!
나 Capitán 아키라. 그대 일벌 보리스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나 일벌 보리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씀드린 대롭니다.
나 일벌 마리아 나 일벌 런던 나 일벌 고태식 나 일벌 영홍 나 일벌 제임슨 나 일벌 캔디맨 나 일벌 버니 나 일벌 소양 나 일벌 구진천 나 일벌 앨리스…. 일벌 보리스를 규탄한다…
일벌들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Mi Capitán은 말문이 막힌 듯하였다. 그 모든 소요를 뒤로 하고 나 일벌 보리스는 뱉은 말에 책임지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채영준과 전기연을 따랐다. 전기연의 넓적하고 평평한 정수리 위에 앉아 머리칼을 꼭 붙잡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원시 벌 조상의 목소리조차 나를 말리는 듯하였지만 8개월이나 살아남은 나라면 벌통 안의 벌들의 조언일랑은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영겁의 시간을 달려 어두운 공간에 정차하였다. 여기가 그들의 집인가 하였더니 또 한 번 철물 방으로 들어가 다시 여기가 그들의 집인가 하였더니 그곳에서 나와 마침내 집으로 진입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집…. 인간의 집에는 인간의 향기가 지나치게 강했다. 나는 그들이 짐 정리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그 집에서 가장 높은, 책꽂이 맨 꼭대기에 앉아 숨을 돌렸다. 곧 강한 인간내가 뒤로 물러나고 음 여긴 꿀향도 강하게 나고… 식물의 향기도 미약하게나마 난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강하게 나 일벌 보리스를 자극하는 것은 짐승의 냄새…. 아니나 다를까 밑을 내려다보니 덩치가 육중한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물은 아니었다. 벌통이 놓여 있던 야산에도 들고양이들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런데 저렇게 덩치가 좋은, 뼈대로 보이는 중심 옆으로도 몸 선이 한참 경계를 넓힌 짐승은 처음이라 말할 수가 있었다. 들고양이와 다른 종인가? 나 일벌 보리스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렇게 얼마나 대치하였을까, 흥미를 잃은 고양이는 동그란 카펫 위에 몸을 말고 엎드려 졸기 시작하였다.
집에서도 방심은 금물이구나….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니었지만 나 일벌 보리스는 나도 모르게 풀어놓은 마음을 한껏 조이고는 잘 때 쓸 만한 구조물을 찾아 살살 날아다녔다. 수목원에 비하자면 손바닥만 한 집이었으므로 둘러보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는데 다행히 괜찮은 물건이 보였다. 수목원에도 여럿 떨어져 있었던 솔방울… 그런데 굉장히 크다? 이 나라의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솔방울에 나 일벌 보리스는 침방을 꾸리기로 결정하였다.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을 향한 쪽은 밀랍으로 벽을 세우고 다른 한쪽은 고양이의 혹시 모를 침범을 경계하기 위해 뚫어 놓는 것으로 완성. 할 일을 마치니 그 아늑하고 오목한 곳에 꼼짝 않고 들어가 있고만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다. 고양이도 잠에 빠져든 듯하였고 채영준과 전기연도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다. 숲속에선 불가하였던 완벽한 고요가 집 안을 향긋한 밀랍처럼 감쌌다. 고요란 좋은 것이구나… 도시에 고요가 있을 줄이야 그것은 나 일벌 보리스로서도 예상치 못한….
정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