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벌 보리스] 4화. 내가 죽인 가장 커다란 것
그러니까 이경순의 말대로 나 벌 보리스에게 살해의 경험이란 이토록 일상적인데, 이경순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나 벌 보리스는 채영준과 전기연의 집에서 지내면서 인간이란 어리석고 둔한 존재라 여기고 그에 대해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을 이어 나가지 않았고 그들이 나 벌 보리스에게 위험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를 똑바로 겨누는 이경순의 눈빛을 보니 그동안 너무 안일했나…… 그래 그러하였지…… 여기서 이렇게 인간의 손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영혼의 손에 죽는대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내가 벌통 밖으로 나와 보고 들은 것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게 된 것만큼은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벌들은 어쩌면 세상을 더 호령할 수도 있는 존재일 텐데…… 나 벌 보리스는 유언에 가까운 상념들을 이어 나가며 실로 오랜만에 벌다운 죽음에의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죽음 앞에 삶에 관한 변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나 벌 보리스, 살해의 경험이라면 수도 없지. 네 말이 맞다.
─응. 죽고 나니 별게 다 보이는구나. 네가 죽인 수천 마리 벌들의 영혼이 지금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으니. 아아 네 침에 죽음을 맞이한 생명 중 벌 아닌 것도 있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벌들은 한 번 침을 쏘면 그 자신도 죽음을 맞는 것 아니니?
나는 매일 밤낮으로 미늘을 물어뜯어 삶이 이어지는 한 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나의 매끈한 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이경순의 앞으로 날아가 궁둥이를 내밀어 직접 그 침을 보여 주었다. 이때 죽음에의 각오를 하였음은 물론이었고, 그런만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 지금 네 앞에서 울고 있는 네 딸의 집에서 왔어. 날 거기로 데려다준다면 넌 복을 받을 거야.
─벌 주제에 사람의 집에서 살았던 거니? 그리고 네가 내게 어떻게 복을 주는데? 나는 이미 죽었잖아! 유령에게도 복이 주어진다는 말은 나 참 처음 듣는구나.
이경순은 나 벌 보리스의 매끈한 침에 대해서라면 전혀 관심이 없었고 딸의 집에서 왔다는 말에도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는 듯하였다. (딸의 집에서 왔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이었고 딸의 집과 같은 층에서 왔다고 했어야 했겠지만 그것은 도착한 뒤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미늘 없는 침을 가진 벌과 인간의 영혼 사이 영겁 같은 침묵이 이어졌고 그 사이를 사람들의 곡소리가 메워 주었다. 어느새 내게서 눈을 거두고 홀로 골똘해진 이경순은 울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씩 하나씩 오래도록 들여다본 뒤 강가에 널린 둥글넓적한 자갈 같은 얼굴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나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같이 가. 그러고 나서 딸의 집에 데려다줄 테니.
이경순은 침대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다시 한번 휘 둘러보았다.

─나 괜찮은데…… 죽으니 몸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 아프지도 않고. 이걸 어떻게 알려 준담…….
그는 천장으로 날아오르더니 사면의 벽을 타고 점점 속도를 높여 가며 날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바람이 일었고 커튼이 펄럭이고 침대 옆 탁상 달력이 파르르 겨울을 향해 넘어가고 조금 전까지 덮고 누웠던 이불이 풀썩이고 사람들의 옷자락이 들리고 바닥에 고인 먼지가 돌풍에 휩싸여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실로 전통적인 유령의 수법이라 할 수 있었는데 (보리스: 너무 고전적……) 이 수법은 여전히 유효한 모양인지 사람들은 즉시 울음을 그치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경순의 존재를 느꼈다. (엄마! 어머님! 경순아! 형님! 할머니!)
이경순은 문을 여는 대신 그저 통과해 버리는, 역시 고전적인 방식으로 방을 벗어났다. 나 벌 보리스는 유령처럼 벽을 통과하지는 못하나 아주 작은 틈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경순을 따라 몇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 같은 건물 3층의 한 집에 도착하였다. 낮인데도 불을 밝힌 곳이 없어 실내가 새벽녘처럼 어둑어둑했다. 그리고 아주 진한 인간의 냄새가 났다. 나 벌 보리스로서는 그 냄새가 쑥 훈연기 바람을 맞은 듯 어지러워 비틀거릴 정도였다.
2인용 갈색 소파에 이경순 또래로 보이는 인간 여성이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팔을 뻗으면 닿는 바닥에는 리모컨, 호두가 담긴 작은 그릇, 약 봉지, 작은 수첩이 일렬로 늘어선 채 그를 지켜주고 있는 듯하였다.
─내 친구야. 전선자.
이경순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되어 또 한 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약 봉지가 바스락거리고 수첩이 펄럭이자 전선자가 슬며시 눈을 떴다. 전선자는 눈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는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점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곧 그는 일어나 앉아 몸을 벌레처럼 웅크리곤 중얼중얼 기도를 외기 시작했는데 이경순은 그 모습을 보고는 킬 킬 킬…… 한참을 웃었다.
─선자가 순진해. 교회 다녀서 귀신은 무섭지도 않다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경순의 장난은 그 뒤로도 한참 계속되었다. 소파에 깔린 담요를 그 안에 누가 누워 있는 것처럼 부풀려 두기, 가지런히 놓아둔 수저를 식탁 맞은편으로 삐뚤빼뚤 옮겨 두기, 티브이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거꾸로 세우기……. 전선자는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눈시울을 붉히며 기도를 하였고 그 기도는 점점 길어져 한 번은 기도를 하다 그대로 잠에 들기도 하였다. 나 벌 보리스는 슬슬 인간의 한심함에 진절머리가 나 이렇게 묻기로 하였다.
─이러려고 온 거야?
─재밌잖어.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한 번을 못 왔는데 선자가 겁이 진짜 많어. 재밌어. 그래도 울기 전에 이제 그만해야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이경순의 장난은 그날 밤에도 또 한 번 전선자를 겨누었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전선자는 거울에 비친 화장실이 우그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경순이 현관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담기면 공간을 일그러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벌인 장난이었다. 전선자는 잽싸게 무릎을 꿇지도, 욕실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변기통에 머리를 박았다.

─에그머니!
이경순이 놀라 전선자를 만지려 하였으나 그의 손은 전선자의 몸을 관통할 뿐.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이경순이 격렬한 감정을 내뿜자 화장실 불이 빠르게 껌뻑였다. 비누와 수건이 떨어지고 바닥에 고인 물이 거꾸로 솟구치고 등등……. 전선자의 손이 화장실 불빛처럼 경련하기 시작하자 이경순은 자꾸만 그 손을 잡으려고 하였다.
나 벌 보리스는 이 소란을 끝낼 수 있는 이는 이 공간에 나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는 전선자의 목 경동맥에 침을 수 차례 꽂아 넣었다. 빵처럼 부푼 목이 전선자의 숨통을 조였고 이내 모든 소란이 잠재워졌다. 전선자는 더 이상 부들부들 떨지 않고 비로소 영면에 접어들었다.
─너…… 이 쬐깐한 게…… 내 친구한테 지금 무슨 짓을…….
한참을 엉엉 울던 이경순은 일순간 눈물을 뚝 그치고 전선자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선자가 안 나오지?
─응?
─선자는 왜 나처럼 안 튀어나오냐고. 왜 귀신이 안 되느냔 말이야.
나 벌 보리스는 이경순의 흥미로운 지적에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정답에 이르렀다.
─이 이는 교회에 다닌다고 했잖아. 천국에 간 게 아닐까?
이경순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나를 일격에 쳐 죽이겠다는 듯 손을 치켜들었다.
(5화에 계속.)